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윌리엄 헨리 해리슨 (문단 편집) == 생애 == || [[파일:Benjamin_Harrison_V.jpg|width=100%]] || || 아버지인 벤저민 해리슨 5세. || [[1773년]] [[2월 9일]]에 [[버지니아 주]]의 [[버클리]]에서 3남 4녀 중의 3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인 [[벤저민 해리슨(건국의 아버지)|벤저민 해리슨]]은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여 이름을 남긴 [[미국]] 건국의 아버지이다. 유년기의 해리슨은 학교가 아닌 집에서 교육을 받았고 1787년에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 입학하여 의학을 공부하였다. 1791년에 벤저민이 병으로 사망하자 해리슨은 의학 공부를 포기하기로 결정하고 학교를 자퇴한 후 [[미합중국 육군]]에 입대한다. [[육군]] [[장교]]가 된 해리슨은 원주민 토벌전에 참전하여 공을 인정받고 중위로 진급한다. 1794년에 그레이트 마이애미 강에서 원주민들을 상대로 기습하는 계획을 성공한 해리슨은 [[대위]]로 진급하여 워싱턴 요새의 경비를 담당하게 되고 재판관이자 부유한 토지업자인 존 사이메스의 딸인 애나 사이메스와 결혼한다. 1798년에 육군에서 전역한 해리슨은 [[존 애덤스]]에 의해 [[노스웨스트]]의 장관으로 임명된다. 이듬해 해리슨은 노스웨스트에 신설된 의회의 의원으로 선출되고 서부의 토지들을 가난한 사람이 사들일 수 있도록 작은 부분으로 나누는 법안을 통과시켜서 토지 개발자들의 보폭을 확장시킨다. 1800년 애덤스에 의해 해리슨은 인디애나 주지사로 임명되어 12년을 활동하였다. 주지사로서 해리슨은 영토에서 원주민들의 생활의 복지를 보호하는 데 탐사하였다. 원주민들에게 주류 판매를 금지하고 [[천연두]] 예방을 명령한다. 1809년에 해리슨은 원주민 지도자들과 함께 화이트 강과 와바시 강에 일대의 토지를 정착인들에게 건네주는 조약을 요청하고 많은 원주민들이 조약을 비난하며 쇼니 족의 추장인 [[테쿰세]]와 연합하였다. 해리슨은 영토 시민군들을 모집하고 토지에서 원주민들을 몰아내기 시작한 해리슨은 [[1813년]] [[10월 5일]]에 템스 강에서 테쿰세가 이끄는 원주민들을 모조리 격파한다. [[1812년]]에 [[미영전쟁]]이 발발하자 [[제임스 매디슨]]은 해리슨을 노스웨스트군의 육군 [[준장]]으로 임명한다. 다시 육군에 복귀한 해리슨은 1813년에 [[소장(계급)|소장]]으로 진급하고 온타리오 남부에서 일어난 전투에서 연합한 영국군과 원주민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다. 하지만 전쟁장관(현 육군장관)과 불화를 겪으면서 다시 육군에서 전역하고 오하이오의 농장에 정착한다. 1816년에 하원의원에 선출되어 정계에 입문한 해리슨은 육군 복무 시절 공금을 오용한 이유로 사법부에게 기소당하지만 하원의 투자회가 잘못된 고발로 결정하면서 처벌을 피한다. 위기를 모면한 해리슨은 다시 오하이오로 돌아와 1819년에 주 의회 상원의원으로 선출되고 1825년에는 연방 상원의원으로 선출되며 승승장구한다. 3년 뒤에 상원에서 물러난 후 [[존 퀸시 애덤스]]에 의해 [[콜롬비아]] 주재 미국 공사로 1년을 근무하였다. 1836년 해리슨은 대통령 선거를 위해 [[휘그당]] 후보로 지명된다. 휘그당원들은 해리슨의 리더쉽이 당을 통합하며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대선 후보로 지명하여 선거에 출마하지만 [[민주당(미국)|민주당]] 소속의 [[마틴 밴 뷰런]]에게 패배한다. 4년 뒤인 1840년에 휘그당원들은 다시 해리슨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고 [[존 타일러]]를 [[미국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여 선거에 돌입한다. 해리슨은 경제공황으로 인해 지지율이 추락한 밴 뷰런을 상대로 승리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당선된 해리슨이 취임식에 참석하여 연설을 하려는 날 강한 [[비(날씨)|비]]가 쏟아졌다. 노령의 해리슨의 건강을 걱정했던 [[참모]]들이 해리슨에게 취임식 연기를 요청하였으나 해리슨은 "난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이오. 비 따위에 내가 무릎 꿇으면 안 되오."라는 말을 남기고는 모자와 [[코트]]도 벗고 취임식을 강행했다. 사실 취임식을 강행했더라도 짧게만 진행했다면 큰 문제는 아니었을수도 있었겠지만, 문제는 그가 사전에 준비한 연설문이 '''8,500단어에 달했는 것이다.''' 이는 역대 美 대통령 취임 연설문 중 압도적인 1위로, 2위인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의 것은 5,500단어 정도였으며, 대부분의 경우 취임 연설문은 1,000 ~ 2,000단어 내외의 길이였다. 68세라는 늙은 나이[* 이 나이는 미국 역대 대통령중 바이든, 트럼프, 레이건 다음으로 고령의 나이로, 심지어 레이건이 깨기 전에는 해리슨이 유일한 고령자 대통령이었다. 이 외에 퇴임 당시의 최고령 기록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나오기 전까지는 전전임자인 [[앤드루 잭슨]](퇴임 당시 69세 534일)이 가지고 있었다.]에 엄청나게 긴 취임 연설을 '''3월 초순의 추운 날씨에 1시간 넘게 비를 맞으며''' 강행한 것이다. 결국 해리슨은 백악관으로 돌아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폐렴]]에 걸렸으며 1개월을 투병하다가[* 무엇보다 당시의 의학 기술의 수준으로는 폐렴을 치료할수가 없었다.] 사망했다. 젊은 사람도 한시간 동안 추위 속에서 비를 맞으면 심한 감기에 걸려 앓아눕기 쉬운데, 하물며 70이 다 되어가는 노인이 견디기엔 상당히 무리였다. 심지어 이 당시는 과학이나 의학도 현대에 비해서는 크게 발달하지 않은 19세기였다. 최초의 [[항생제]]인 [[페니실린]]이 20세기 초인 1928년에 발견되었음을 감안하면 당시에는 감염성 질병에 걸리면 신체의 자연치유력에 기대는 [[대증요법]]을 제외하면 딱히 치료수단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당대의 의학 수준을 생각하면 정말로 만용을 부린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사망하기 전 해리슨은 자신의 후임자가 될 부통령이자 고향 후배[* 카운티(찰스시티)까지 고향이 동일하다.]인 타일러에게, 다음과 같은 국정에 대한 조언을 남겼다. >'''나는 타일러 씨가 정부의 깊은 원리를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며 또한 그 원리가 순탄하게 이루어지기를 바라오. 내가 바라는 것은 그것 뿐이오.''' 해리슨의 죽음은 미국 휘그당에게는 큰 타격이 되었다. 휘그당은 이후로도 [[재커리 테일러]]를 대통령에 당선시키지만, 그 역시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병사했으며, 그나마 휘그당이 상하원 모두에서 다수당을 차지한 것은 해리슨이 승리한 1840년이 마지막이었다. 시작부터 잭슨 민주당에 대한 반발로 결성된 연합세력이었던 휘그당은 여당으로서 새롭게 재조직될 기회를 놓쳐버렸고, 차츰 남부와 북부로 분열되어 갔다. 중도 타협 노선을 앞세우던 [[헨리 클레이]]는 1844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지만 [[미국 멕시코 전쟁]]을 지지하지 않아 패배했다. 결국 북부의 휘그당은 [[미국 공화당|공화당]]으로, 남부의 휘그당은 헌법연합당이나 [[미국 민주당|민주당]]으로, 이외의 반유대주의,반이민주의 세력들은 [[무지당]] 세력으로 각자의 길을 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